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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런것들

Target is Pearl Harbor

* 일본 대도박을 결심하다.

 1941년 8월 일본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육군대장 도죠 히데끼를

필두로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세계지도를 펴놓고

은밀하게 야심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독일이 승승장구 하면서 전 유럽을 흔들어 놓자 일본도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동남아 지역은 100여년동안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등 서국 각국이

식민지화한후 자원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시대가 변하여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독일에게 패하여 본국이

점령당함에 따라

식민지 관리를 위한 군사적인 능력을 상실했으며,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하기에도 벅찬 상태로 독일의 침공에

맞서서 본토 방위에 신경을 써야 했으므로

식민지 관리에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 유럽인들에 의한 동남아시아 지배가 절정에 달하던 무렵의 상징적인

사진이다. 파티에 참석하려던 프랑스장교가 왜소한 현지 원주민에게 업혀서 도랑을

건너고 있다. 그러나 곧 새로운 지배자를 노리는 일본군의 침공으로 유럽인들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나라로 성장한

일본은 아시아의 자원지대는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인 일본이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때맞추어 유럽에 전쟁이 발발하자,

이 동남아의 자원 지역이야말로 일본에게는 임자가 없이 방치된

먹음직스런 고기덩어리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으며

아시아의 번영을 위해서 일본이 나서 서구 열강을 몰아내고

아시아의 자원을 공유하는 아시아인들이 번영해야한다는

침략의 명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무렵

 

일본은 1937년에 시작되어 초전에는 승승장구 했으나

4년째 광대한 중국대륙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중국에서의

오랜 전쟁으로인해서 광대한 식민지 유지와

전쟁을 수행할 자원이 점차로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이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석유가 큰 문제였다.

 

 

 

대부분의 석유는 미국을 통해서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 석유를 구할 다른 방법을 찾지 않는 한

 

 

미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것이다.

 

 

1941년 8월을 기점으로 일본이 비축하고 있는

 

석유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18개월 분량이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수치였다.

 

 

석유야말로 전쟁수행에 꼭 필요한 것이었으며

 

 

일본군은 점점 더 많이

 

 

석유를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매일 규모가 커지는

 

 

일본 해군만해도 군함들과 함재기가

 

 

소모하는 석유소모량이 하루에 400톤을 넘고 있었다.

 

 

[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명분으로 계획한 지도, 아시아 전체를 일본의 지배하에 두겠다는 야욕이 보인다. ]

 

한편,

 

유럽과 중국등의 어떠한 전쟁에도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은 태평양에서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1940년 7월 기존의 해군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야심적인 새로운 해군의 건설을 발표했다.

 

 

이 계획의 골자는 1940년 현재 일본의 전투함에 비해서 7 : 10으로

 

 

근소한 차이로 우세한 미국의 해군전력을 1943년까지는 5 : 10,

 

 

1944년까지는 3 : 10으로 벌려 놓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7 : 10으로 우위라고 해도

 

 

미해군은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나누어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태평양만 놓고본다면 일본이 전투함의 수적으로는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산업능력으로 볼 때 이 계획은

 

 

예정대로 이루어져 조만간

 

일본해군을 수적으로 완전히 압도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미국은 1939년 루즈벨트의 은밀한 명령으로

 

 

1940년 5월이전에 일본에 대한 견제와

 

 

세과시를 위해서 전통적인 미해군기지였던

 

 

샌디에고에 주둔하고 있던 미 태평양 함대를

 

하와이의 진주만으로 이동 배치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로서 미 태평양 함대는 바로 일본의 목전까지

 

 

위협할 수 있는 거리에 와있게 되었다.

 

 

특히 중국인들이 미의회에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의

 

부당성과 만행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로비를 벌이자,

 

 

중국에 대해서 호의적인

 

미의회의 여론은 점차로 일본이 중국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결국 미국은 일본에게 중국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석유를 비롯한 필수물자의 수출을

 

 

전면 금지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전달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일본의 정부의 군국주의자들은 난감해졌다.

 

 

그들은 이제와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자니 많은 인명 손실과

 

전쟁 물자를 퍼부으며 진행중인 중국전선에서

 

물러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자니

 

 

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석유도 절실하게

 

 

필요한 상태였다.

 

 

게다가 미국이 일본의 내정에 간섭하려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미국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한 앞으로도

 

 

미국은 사사건건 일본의 앞길을 막으려 할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일본의 우려는 1941년 7월 일본이 제 25군을 이동시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지역을 점령하자

 

 

미국이 즉시 철수를

 

 

 

요구하면서 석유의 금수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분명해졌다.

[ 미국의 압력에대응한 일본의 선택, 1940년의 삼국동맹을 기념하여 도꾜의 긴자거리에 나부끼는 추축국의 국기들 ]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에게는 이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미국의 압력에 치욕적으로 굴복하느니 미국의 압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원을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하자면

 

 

천연자원이 풍부한 동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한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유전지대를 점령하여

 

 

석유를 포함한 자원을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계획에는

 

 

하와이로 전진 배치된 미태평양 함대가

 

 

가장 큰 위협이었다.

 

 

사실상 필리핀에 주둔중인 미군의 병력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일본군에비해 별로였으므로,

 

 

하와이의 미해군만 없다면 일본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허수아비같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식민지군대는 무시해도

 

좋은 수준이었고, 영국군도 별 위협이 될 수는 없을 것인데,

 

눈엣가시같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언제든지 쳐들어올 수 있는

 

 

위치로 전진하여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게 있어서 미태평양 함대의 하와이 전진 배치는

 

 

마치 '목에 들이댄 칼'과도 같은 큰 위협이었다.

 

 

 

한편 미국은 일본에게 계속 침략전쟁을

 

 

중지할 것에 대한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철병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와 맺은 3국 동맹을 파기하지 않는한

 

경제봉쇄는 계속될 것이라고 미국의 헐 외무장관은

 

큰소리 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의 외무대신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중국에대한 미국의 비공식적인 무기지원을 중단하고

 

 

석유수출을 재개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양측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계속 변함이 없었다.

 

 

미국이 중국에서의 일본을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면 일본의

 

외교부는 다음과 같은 대응 성명으로 맞섰고,

 

 

서로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 양국의 태도는

 

서로간의 감정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까지 악화시켰다.

 

"이제 일본은 막 외부로 뻗어나가려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발전단계의 나라가 그 이웃나라를 괴롭히지 않은 예가

있었는가?

 

미국인들은 자신들을 돌아보라!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멕시코인들에게 물어보라!

 

미국인들이 얼마나 잔혹한 방법으로 그들을 다루었는가를..."

 

 

그러나

 

미국은 아시아의 작은나라 일본에 대해서 전혀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미국정부는 심리적으로 일본을 얕보고 있었다.

 

 

미국정부는 일본을 이러한 위협만으로도 쉽게 다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계속 일본에게 치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외교적 요구를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이고 단호한 태도는 점차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을 궁지로 몰고 있었고,

 

일본에게 더 이상 미국과 교섭가망은 없어보였다.

 

 

군국주의자들에게는 이제는 치고나가느냐,

 

아니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느냐 하는 선택만이 남아있었으며 그들이

 

무엇을 선택할 것이라는 것도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다.

 

 

 * 왜 진주만인가?

 

 

이런 상황에 몰리자 일본 수뇌부는 자신들의 야망을 펼치기 위해서

 

 

단하나의 방해세력인 미 태평양 함대에게

 

 

결정적인 공격을 가해서 치명적인 손상을

 

 

입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일본에게 상황이 점점 불리해질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다급하게 내린 결론이었다.

 

 

1939년 8월 일본해군 연합함대 사령관의 자리에 올라

 

일본해군의 수장이 야마모토 이소로구 제독은 장교시절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경험이 있어 미국 산업의 잠재력을

 

잘 알고 있었고,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계속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미국과 전쟁을 하게되면 일본에게 파멸적인 결과가

 

올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고

 

일본해군을 대표해서 계속 전쟁에 반대했다.

 

 

그러자 일본의 열성 군국주의자들이 야마모토를 공적으로 치부하고

암살을 기도했다.

 

사실 이시기의 일본은 군국주의자들에게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암살을

당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그의 성품을 잘 이해하고 있던 해군대신은

 

야마모토를 암살자들의 손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바다로 내보냈던 것이다.

 

[ 하와이 진주만의 풍경, 진주만 기습 한달 전의 모습이다. 가운데의 섬이 포드섬이고 그옆에 전함들이 정박해있다. 이렇듯 전투함들의 정박지로서는 최상이었지만 항의 입구가 좁아 기습을 당하면 함선들이 빠져나갈곳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야마모토를 비롯한 해군 지휘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를

 

쥐고 흔들던 수상겸 육군대장 도죠 히데끼는

 

 

1940년 9월 27일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었으며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 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야마모토는 이렇게 된 바에는

 

 

일본해군이 전면에 나서서

 

 

 

미 태평양 함대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 빠른시일내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미국과 강화를 체결하는 수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진주만에 집결해있는 미 태평양 함대를

 

 

일거에 격멸하게 위한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새로운 전쟁은 육군보다는

 

 

일본 해군이 주역을 맡아서

 

수행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계획대로 미태평양 함대를 진주만에서

 

 

신속하게 격멸시킨다면

 

 

미국은 함대를 2배나 먼거리의 미국 본토로

 

 

철수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고

 

 

함대 규모에 있어서 일본의 연합함대가 훨씬 우세한 상황이 되므로

 

태평양의 제해권은 쉽게 일본에게 넘어올 것이었다.

 

 

 

미국의 산업이 군수체제로 가동되어 군수물자를

 

 

쏟아내기전에 승기를 잡아댜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유리한 조건을 내세워

 

 

미국과 강화조약을 맺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야마모토에게는 신속하고 확실한 승리가

 

꼭 필요했다.

 

 

야마모토는 일왕 히로히토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히로히토가

 

 

 

일본해군의 능력으로

 

 

 

미해군을 제압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처음 1년간은 분명히 두드러진 활약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1년을 넘긴다면 그때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산업능력을 잘알고 있던 야마모토는 전쟁이 시작된지

 

 

1년후면 미국은 엄청난 산업능력으로 군수물자를

 

쏟아낼 것이고

 

이렇게 되면 상황이 매우 어려워 질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야마모토의 우려에 대해서

 

 

일본 수뇌부는 1년이면

 

유럽의 독일군이 소련군을 충분히 제압할 것이고

 

 

미국은 유럽 전선에 신경을 써야할 처지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태평양의 전쟁은 포기하고

 

 

 

일본이 점령한 영토를 인정하는

 

 

강화조건에 응해야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 항공모함 아까기, 일본해군의 상징과도 같은 항모이다. 애초에는 60기의 함재기를 탑재했으나 계속된 개수를 통해 비행갑판이 넓어지고 함재기 90기까지 탑재가 가능하게 되었다. ]

 

결국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1941년 가을 일본 수뇌부에서는 수많은 작전회의가 열렸다.

 

대부분의 육군 장성들은

 

동남아시아의 유전지대를 손에 넣으려면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병력을 제거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 있었지만,

 

회의가 열릴 때마다 야마모토는

 

남방작전을 시행하기전에

 

 

진주만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태평양 함대를 그냥 놔두고

 

 

남방작전을 감행하는 것은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는 위험한 것이라는 것이

 

야마모토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해군장성들은 대부분 이 계획에 반대했다.

 

 

일본해군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장성들은

 

해전의 승리는 전통적인 전함의

 

거포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해군의 항공력으로

 

 

선제공격을 한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작전이었다.

 

 

게다가 무슨 수로 적에게 들키지않고

 

 

6척의 항공모함과 20여척의 호위함대를

 

 

이끌고 그 먼 태평양 한가운데까지

 

 

가지고 간다는 말인가?

 

 

만일 작전이 발각되면

 

일본해군은 미해군의 홈그라운드에서

 

불리한 해전에 빠져들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러나

 

 

해전에도 항공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야마모토는 다른 해군장성들이 주장하는

 

 

고전적인 전함의 거포에 의한

 

해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식의 포격전을 위주로한 해전은

 

설사 승리한다고 해도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며,

 

 

이미 미국도 항공모함을 가지고 있는이상

 

일본의 전함들이 전면에 나서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일본해군 조종사들이 소지하고 있었던 진주만 지도이다. 진주만 기습 당시 격추된 일본기에서 발견된 것으로 공격목표들이 요약되어 있다. ]

 

그는 단호하게

 

일본의 항모가 기습 공격의 주력이며

 

 

진주만 공격은

 

일본의 모든 작전중에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한다고

 

역설했고,

 

결국 전함파 제독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접여야 했다.

 

결국,

 

그의 자신있는 주장에 수긍한 일본 수뇌부는

 

진주만 공격을 허가했다.

 

 

그리하여 일본해군이 전력을 기울여 공격할

 

최우선적인 공격목표는 진주만으로 정해졌다.

 

 

물론 해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는 것과

 

동시에 남방작전도 개시되어

 

일본 해군과 육군도

 

동남아시아 방면의 미군과 영국군에게 즉각적인

 

기습 공격에 착수하기로 되어 있었다.

 

* 일본해군 태평양을 넘보다.

 

1941년을 기준으로 일본해군은 미국의 생각과는

 

달리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충분히 미해군과 일전을

 

벌일 만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해군은 일본을 과소평가하고 이었고,

 

감히 일본이 미국에게 도전해 오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므로 태평양보다는

 

유럽전장과 인접한 대서양쪽을 더 중요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미해군의 항공모함은

 

대서양쪽에 더 많이 진출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때까지

 

미국은 일본을 압박하기 우한 수단으로

 

진주만으로 함대를 전진 배치시켰을뿐,

 

전쟁에 빠져들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전쟁 준비에 대해서는

 

소흘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반면, 일본군은 중일전쟁의 경험으로 많은

 

새로운 함선과 항공기를 생산했고

 

승무원들의 실력도 세계최고의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일본해군의

 

 

항공모함 전력은

 

 

가공할 수준이었다.

 

아래의 도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항공모함만을 놓고 비교해 보았을 때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미 태평양 함대와 일본 해군간의 전력에서는

 

오히려 일본해군쪽이 우위에 있었다.

 

 

더구나 항공모함에 탑재되는

 

 

함재기들의 성능도

 

 

미군이 생각하는 것보다 우수했다.

 

중일전쟁 막바지에 데뷔한

 

해군의 최신 0식 함상 전투기 (A6M2 제로)는

 

체공시간이 무려 7시간에 달하며

 

무장도 강력하고 어떠한 미해군기보다도

 

빠르고 날렵한 기동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제로전투기는 개전하자마자

 

일본해군이 태평양의 제해권을 단숨에

 

 장악하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이외에도 97식 함상공격기 (B5N)이나

 

99식 함상폭격기 (D3A)같은 주력 함재기들의 성능도

 

미군의 주력기들에 비해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약간 성능이 좋았다.

 



































































































미해군과 일본해군의 항공모함 전력비교 (1941년 11월말 기준)


 


항공모함


전투기


급강하 폭격기


뇌격기


미해군 - 태평양


엔터프라이즈


F4F - 18기


SBD 돈트레스 - 36기


TBD 데바스테이터 - 18기


렉싱턴


F2A - 18기


SBD 돈트레스 - 36기


TBD 데바스테이터 - 18기


미해군 - 대서양


호넷


F4F - 18기


SB2C 헬다이버 - 36기


TBD 데바스테이터 - 8기


레인저


F4F - 36기


SB2U 빈디케이터 - 36기


없음


사라토가


F4F - 18기


SBD 돈트레스 - 36기


TBD 데바스테이터 - 18기


와스프


F4F - 36기


SB2U 빈디케이터 - 36기


없음


요크타운


F4F - 18기


SBD 돈트레스 - 36기


TBD 데바스테이터 - 18기


롱 아일랜드


F2A - 7기


SOC 시걸 - 13기


없음


일본해군


아까끼


A6M - 21기


D3A - 18기


B5N - 27기


가가


A6M - 21기


D3A - 27기


B5N - 27기


히류


A6M - 18기


D3A - 18기


B5N - 18기


소류


A6M - 18기


D3A - 18기


B5N - 18기


쇼가꾸


A6M - 18기


D3A - 27기


B5N - 27기


즈이가꾸


A6M - 18기


D3A - 27기


B5N - 27기


호쇼


A5M - 11기


없음


B5N - 8기


쭈이호


A5M - 16기


없음


B5N - 12기


류조


A5M - 16기


없음


B5N - 18기


 

특히 야마모토가 자신을 얻은 것은 1940년 11월,

 

영국해군의 항모에서 출격한 소드피시 뇌격기들이 어뢰공격으로

 

이탈리아의 타란토항에 정박중이던 이탈리아 전함들을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린 사건 때문이었다.

 

 

유럽에서도 1차대전식의 함대전투는 종말을 고하고

 

항공모함이 점점 전면으로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독일 해군의 세력이 약했고, 함재기들의 역할이 단지 함대의

 

보조역할로 한정되어있던 영국의 함재기들은

 

대양해군으로 육성되던 미국이나

 

일본의 함재기들에 비해서는 훨씬 뒤떨어지고 있었다.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 격침작전과 타란토항 기습에서 대전과를 올린

 

소드피시 뇌격기들조차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복엽기들이었던 것이다.

 

[ 기습전에 미해군기가 촬영한 진주만 한가운데의 포드섬, 이른 바 Battle ship row (전함열)이라고 불리는 전함용 정박지의 모습과 전함들이 잘 보인다. ]

 

일본해군의 작전참모 겐다 소령은 타란토항 기습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

 

진주만 기습작전을 점차로 구체화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해군의 구식 복엽기들이 저런 대전과를 올렸는데

 

일본해군의 고성능 함재기들을

 

300대이상 동원하여 불시에 기습을 한다면

 

미 태평양함대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타란토항과 진주만은 매우 유사한 점이 있었다.

 

양쪽 모두 수심이 얕았고 항의 입구가 좁아 내항에

 

정박중인 함선들이 쉽게 빠져나갈 수 없었다.

 

애초에 어뢰공격을 하기에는 수심이 너무 얕다는 지적에대해서 겐다는

 

타란토항도 수심이 얕지만

 

뇌격기들이 어뢰로 성공적인 공격을 했으며,

 

우리도 못할 것이 없다는 반론을 내세웠다.

 

* 수병들의 천국 진주만

 

한편, 미태평양 함대가 진주만으로 이동함에 따라서

 

하와이는 경제적으로 매우 번성하고

 

있었다.

 

수많은 인력들이 하와이로 이동했고,

 

태평양 함대의 함선들이 속속 하와이로 들어오면서

 

수만명의 수병들이 상륙함에 따라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고,

 

하와이 전체가 새로운 경제적 도약기를 맞고 있었다.

 

 

맑은 하늘과 열대의 해안,

 

그리고 아름다운 미녀들...

 

이런 소문이 돌면서 미해군 병사들은 너도나도 천국같은 하와이로의

 

전속을 원하고 있었다.

 

[ 상륙허가를 받은후 하와이의 해수욕장에서 원주민 아가씨와 사진을 찍고 있는 수병들, 그야말로 하와이는 미해군 수병들이 꿈에그리던 근무지였다. ]

 

불바다가 된 유럽이나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하와이에 배치된 이들에게는 너무나 먼거리에서 벌어지는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특히 웨이크도나 미드웨이제도 등의 전초기지에 배치된 미군병사들은

 

어떻게 하면 무덥고 생활여건이 열악한 이 작은섬에서 벗어나

 

하와이로 전속명령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전전긍긍하고 있을 정도였다.  

 

몇몇 뜻있는 장교들은 일본군의 위협에 대해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설사 전쟁이 벌어진다해도

 

일본해군 따위야 미해군이 쉽게 격파할 수 있다는

 

쪽이었다.

 

게다가 만일 전쟁이 발발한다면 필리핀쪽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동료들이 좀 고생할지도 모른다는 식의 그야말로

 

전쟁은 먼 남의 나라 얘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미군 병사들은 일본인들에대한 경계의식이 전혀없이 오히려

 

다음과 같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만든 총은 조잡하기 이를데 없어 총을 쏴도 명중될리가

없으며, 설사 그 총에는 맞아도 멍이 좀 들정도일뿐이다.'

 

'일본 비행기는 엉성하게 만들어져서 하늘을 나는 것도 신기한일이다.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그런 비행기를 타고다니는 놈들이 조종사라니...거참 불쌍한 일이다.'

 

하와이의 술집이나 호텔, 해수욕장은 주말에

 

상륙허가를 를 받은 수병들로 들끓었으며

 

이런 천국같은 생활에 대해서 모두들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경제 봉쇄를 선언한후에도 일본과의 협상을

 

계속했던 미정부는 일본의 침략위협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감을 잡고 있었지만

 

 

설마 일본이

 

우리 미국에게 대들겠는가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적극적으로 대처하려 하지 않았다.

 

만일의 사태로

 

일본이 전쟁을 시작한다해도

 

동남아시아의 미군 주둔지가 그 첫 번째 공격목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만일 그렇게 되면 진주만에 주둔중인

 

태평양함대를 즉시 파견하여 쉽게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진주만이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않고 있었다.

 

(물론, 진주만 기습을 예견한 장교도 있었지만,

 

그는 이런 말을 하자마자 곧 비웃음을 사면서 무시당해야 했다.)

 

 

이것이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을

 

 

앞둔 미군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자료원:http://airwar.hihome.com/airwar/ww2-pacific/part-1/ww2-pac-1-3.htm

 

http://my.execpc.com/~dschaaf/timeline.html

펄하버 일본 기습공격시 상황

 

 

Second world war asia 1937-1942 map d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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